번역이 안 되는 한국어, 정(jeong) — 미운 정 고운 정까지
한국살이가 긴 외국인들이 “이 단어만은 번역이 안 돼요”라고 입을 모으는 말이 있습니다. 오늘의 표현, **정 (jeong)**입니다. 이웃집에서 반찬 그릇이 넘어오고, 시장 할머니가 콩나물 한 줌을 덤으로 얹어 주고, 다투기만 하던 동료가 떠난다니 이상하게 서운할 때 — 한국 사람들은 이 모든 마음을 한 글자로 설명합니다. “정 때문이지, 뭐.”
정
**정 (jeong)**은 사람·동물·물건·장소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천천히 쌓이는 애틋한 마음입니다. 핵심 뉘앙스는 세 가지입니다. 첫째, 정은 첫눈에 생기지 않습니다. 시간이 재료입니다. 둘째, 대상이 사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. 낡은 자동차, 오래 산 동네에도 정이 듭니다. 셋째, 좋은 감정만도 아닙니다. 싸우고 미워하면서도 쌓이는 **미운 정 (miun jeong)**이 있어서, “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”라는 말까지 있습니다.
국립국어원 사전으로 확인하기
국립국어원 《한국어기초사전》은 명사 ‘정’을 이렇게 풀이합니다.
정 「명사」 1. 무엇을 느껴서 생기는 마음. — 영어: jeong; bond; feeling — “A state of mind that forms when one feels something.” — 스페인어: afecto, cariño — 중국어: 情 2. 사랑하거나 사이가 가깝다고 느끼는 마음. — 영어: jeong — “A feeling of love or closeness.” — 스페인어: afecto, cariño, inclinación — 중국어: 情, 情意
영어 뜻풀이가 번역 대신 로마자 jeong을 그대로 쓴 점이 인상적입니다. 소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자체가 이 단어의 고유함을 보여 줍니다. 포르투갈어 번역은 사전에 없어 자체 번역으로 덧붙입니다: afeto, carinho (자체 번역). 한 가지 밝혀 두면, 이번 조회에 함께 내려온 사전 예문들은 ‘결정(決定)‘의 정, ‘정치가’의 -가(家)처럼 소리만 같은 다른 말의 예문이라 싣지 않았습니다. 아래 예문은 모두 직접 만든 문장입니다.
상황별 활용 예문
- “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, 가신다니 섭섭해요.” (Geudongan jeong-i mani deureonneunde, gasindani seopseopaeyo.) — 이사 가는 이웃, 퇴사하는 동료에게 건네는 인사. ‘정이 들다’가 기본형입니다.
- “이 차 낡았지만 십 년을 탔더니 정이 들어서 못 팔겠어.” (I cha nalgatjiman sip nyeon-eul tatdeoni jeong-i deureoseo mot palgesseo.) — 물건에도 정이 듭니다.
- “우리 단골집 사장님은 정이 많아서 늘 반찬을 더 주셔.” (Uri dangoljip sajangnim-eun jeong-i manaseo neul banchan-eul deo jusyeo.) — ‘정이 많다’는 따뜻한 성품을 칭찬하는 말입니다.
- “그 거짓말을 듣고 정이 뚝 떨어졌어.” (Geu geojinmal-eul deutgo jeong-i ttuk tteoreojyeosseo.) — 반대로 마음이 식을 땐 ‘정(이) 떨어지다’를 씁니다.
존댓말·반말, 그리고 비슷한 말과의 차이
‘정’ 자체는 높임과 무관해서 어미만 바꾸면 됩니다. 존댓말은 “정이 들었어요 (jeong-i deureosseoyo)”, 친구에게는 “정 들었네 (jeong deureonne)”. 비슷한 말과 비교하면 윤곽이 선명해집니다. **사랑 (sarang)**은 뜨겁고 강렬하며 첫눈에도 가능하지만, 정은 뭉근하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마음입니다. **우정 (ujeong)**은 ‘친구 사이’라는 관계의 이름이지만, 정은 사람·동물·물건을 가리지 않습니다. 그래서 “사랑은 식어도 정 때문에 산다”라는 어른들의 말이 성립합니다.
문화 배경 — 초코파이와 골목의 저녁
한국에서 ‘정’은 과자 상표에까지 새겨져 있습니다. 초코파이 포장에 큼직하게 적힌 한자 ‘情’과 “말하지 않아도 알아요”라는 광고 카피는 수십 년간 이 단어를 국민 정서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. 드라마 《응답하라 1988》 (tvN, 2015)에서 쌍문동 이웃들이 저녁마다 서로의 집으로 반찬 접시를 나르는 장면은, 대사 한 줄 없이도 정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명장면으로 꼽힙니다. 여러분 나라에도 이런 ‘이웃의 마음’을 부르는 말이 있나요?
마무리 퀴즈
10년 다닌 회사를 떠나는 날, 낡은 책상을 쓰다듬으며 할 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?
① “책상아,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쉽다.” ② “책상아, 우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쉽다.” ③ “책상아, 사랑이 많이 들었는데 아쉽다.”
정답은 ①. 물건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만든 마음에는 ‘정’이 정답입니다. 댓글로 여러분이 정든 물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!
이 글의 단어 뜻풀이와 예문은 국립국어원 《한국어기초사전》(krdict.korean.go.kr)에서 가져왔으며, 해당 부분(번역 포함)은 CC BY-SA 2.0 KR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·배포됩니다.